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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에게2005/09/27
관리자

나의 육신의 한 부분을 떼여놓고 온지도 어언간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구나.
며칠만 있으면 추석이다. 이곳 한국에서는 추석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정하고 모두가 고향 선친의 묘소도 찾아가고 그동안 혜여저서 살던 온 집안 식구들이 한데 모여서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 축제 속에서 며칠 몇 밤을 보낸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혁이야!
이날을 맞아 이곳에 있는 우리 가족들도 한데 모여서 이름 없는 한 산 기슭에 안치된 너의 아버지도 추억하고 산소를 찾지 못하는 불행한 현실을 통탄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안하려 한다.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의 정도 나누고 고무와 격려를 하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조국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할 것이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모든 아픈 추억을 고스란히 묻어둔 채 자기의 궤도를 따라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구나, 이 어머니는 자신을 준비된 한 여성으로 자부하고 군복무에서 불치의 병을 만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생에 대한 어떠한 담보도 없는 한 제대군인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더불어 그의 동지애에 대한 인성에 반해 열렬한 구애전선을 펼쳤고 그 결과 끝내 너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고 어머니에게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혁명동지가 되였단다.

우리는 남의 집 곁방살이부터 시작하여 밥가마 한 개와 수저 두개, 홑이불 한 채로 살림을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 세상 그 어느 부부보다도 행복한 부부가 되였단다. 이러한 사랑의 결과로 너의 아버지가 병마와 싸워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위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내주는 부부로 되였단다.

너희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5년 만에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큰 기관의 지배인(한국의 회장, 사장 직)이 되였고 아무러한 문제없이 대바르고 훌륭히 자란 너희 사형제들을 주의 사람들이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가족 이였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제 몸처럼 아끼며 사랑해왔었단다.

하루는 너희 아버지와 내가 너희 형제들을 모아놓고 장래 희망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그때 9살이던 네 형은 큰 사업가로, 큰 간부가 된다고 했고 너는 장군이 될 거라 했고 네 동생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했고 막내는 아버지 같은 간부가 되겠다고 했었단다. 그 순간 너의 아버지와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대도 너희들 보다 값진 것은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도 없는 그런 행복을 만끽했고 이러한 아들들을 키우는 우리들이 한 가정의 세대주나 주부가 아니라 이 나라와 이민족에게 꼭 필요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여야 한다는 각오를 했단다.

특히 너는 남달리 체구도 좋고 영특하고 주의 판단력이 뛰어나 전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한  7년제 의무교육의 첫 대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만 6세에 인민학교에 입학했었단다. 그때부터 너는 학급의 간부로 발탁 되였고 너의 구령 한마디에 전 학교 생을 움직이는 책임자가 되여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차곡차곡 밟아나가기 시작했었단다.

그러던 시절 너의 아버지가 네가 인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만 생의 마지막순간을 현장에서 맞는 사건이 일어나고 다친 몸으로 현장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하다가 그 자리에서 순직했었단다.

그때 너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외국어학원에 추천받았고 구역 적으로 2명 추천에서도 우선순위로 선택 되였다는 사실에 너는 하늘을 날것처럼 기뻐했었지, 내가 아버지 병실에서 주야로 간호하다가 학원 입학시험장에 갔는데 모두가 양부모는 물론 친척까지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어 수험생을 응원하고 있는데 너는 점심밥도 없이 단독으로 시험장에 들어갔었지, 그러나 너는 그때도 당당한 모습 이였고 네 모습이 너무나 안돼 보여 내가 울고 있자 “어머니! 걱정 말아요, 입학 못하면 나는 군대에 가서 장군이 되겠어요, 빨리 가서 아버지를 간호하세요, 아버지가 혼자서 얼마나 어머니를 기다리겠어요?” 하면서 내 등을 떠밀어 보냈었지,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지만 나는 모진 마음을 먹고 병원으로 향했고 너는 결국 입학 못했고 너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집에 오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었지,

그때 외국어학원 입학은 자신은 물론 부모들의 힘이 더 앞서는 시기라 결국 너는 구역 적으로 학과경연에서 1등을 하고도 낙방하였었단다. 그때 너는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처럼 어깨에 왕별을 단 장군이 될 수 있다고 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안했었지,

사랑하는 아들 혁이야!
지금도 나는 네가 전문학교시절 대대장으로 모든 면에서 언제나 모범이여서 학교에 찾아갔을 때 학교 교장선생님이 “이때까지 대대장들 중에서 혁이 처럼 완벽한 학생은 처음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습니다.”라고 칭찬했을 때 홀어머니 슬하에서 너희들이 그처럼 훌륭히 자라난 것을 얼마나 대견해 했고 저 세상에 먼저 간 너희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모른단다.

그러던 네가 드디어 군복무를 하루도 안하고 곧장 인민무력부 기술대학에 당당하게 입학하고 3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하고 OO나라 공군대학으로 군사유학을 떠나게 되였을 때 이 어머니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네 형은 벌써 2년 전에 동구권의 OO나라 공업대학에 유학 갔고 네 동생들은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하고, 참으로 그때 그 시절의 긍지와 행복감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니, 장군 복을 입고 40여명의 친구들과 함께 순안비행장에 나갔을 때 나와 함께 있던 부모님들은 자랑스러운 자식들을 둔 긍지로 하여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도 알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동구권 사회주의나라들이 연이어 붕괴되고 그 나라들에 갔던 유학생들이 맨몸으로 줄줄이 귀국했고 드디어 너희 군사대학 유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왔었지, 빈약한 주머니를 아껴가면서 이 어머니가 겨울에 천신을 신고 발이 시려서 동동 구르는 것이 가슴 아파 어머니 목구두 한 켤레를 사가지고 온 너였었지, 짐들은 다 호실에 놓고 빈 몸으로 탑승시키는 그 순간에도 너는 그 신발은 외투 속에 감추어가지고 와서 이 어머니를 또 한번 울리었었지, 그러던 너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다.

네 형이 조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대한민국으로 온 것이 큰 죄에 걸려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혁명가 유가족”에서 “민족반역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눈보라가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1990년 12월의 마지막 날 설날을 2일 앞두고 우리 온 가족은 혈육한점 없는 북한의 최북단 탄광오지로 쫓겨나던 날, 나는 식물인간처럼 아무것도 의식할 수조차 없었단다.

먼저 귀국해 인민군 군관으로 입관했던 네가 제대배낭을 메고 이 어머니 앞에 나타나 “어머니, 힘을 내세요, 제가 형님대신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기둥이 되여 그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나와 막내 철이를 부둥켜안고 사나이 울음을 터뜨리던 네 모습을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곳에서 네가 우리 집 기둥이 되여 모든 일을 훌륭히 처리해 나갔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구나,
너는 나한테 있어서 아버지였고 큰 형이었고 믿음직한 지주였고 동생들한테는 아버지였고 형님 이였단다. 네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 험한 세상 풍파 속에서도 정의로 불의 앞에서도 각자 서야할 위치와 임무를 알 수 있었고 지킬 수 있었단다.

그러던 네가 너무나도 외로운 우리 가정에 행복의 웃음을 선사할 고운 처녀를 이 어머니의 며느리로 맞게 했고 1년 후 귀여운 내 첫 손자 명성이를 안겨주었구나, 이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첫 손자 명성이는 출생 자체부터가 우리 가정의 행운의 시작 이였고 행복의 샘터였단다. 배급이 끊기여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던 어느 날 네가 어느 집 결혼식에 갔다가 떡 2개와 순대 한 토막을 가지고와 나의 손에 쥐여주면서 내가 이 음식을 행여나 동생들한테 줄까봐 대문 밖에서 보초까지 섰었지, 어머니! 우리는 젊었으니 아직 기운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허약에 걸려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집 기둥이 없어집니다. 눈을 꼭 감고 빨리 잡수세요. 라고 하던 네 모습을 나는 죽어도 잊을 수가 없단다. 그때 그 음식은 그 어느 임금의 밥상에 오르는 진수성찬에 비길 수 있겠니, 이처럼 너는 이 어머니를 감동시키고 울리고 의젓하게 자라주었단다.

그러던 네가 우리 가족을 찾는 큰형이 제 3국에 왔고 그곳에 가서 형을 만나 결국 한국행을 결심하고 우리 가족을 데리려고 다시 강을 건넜지, 10여년 만에 만난 너희 형제는 8시간동안 울고 웃으며 온밤을 지새웠고 하룻밤만 지나면 어머니와 동생들, 처와 자식을 데리고 다시 형한테 가기로 하고 떠나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발걸음을 움직이지 못했었지, 그래 네 형이 “야! 이 자식아, 힘들게 헤어지면 힘들게 만난다는데...어서 빨리 가라”하면서 먼저 뒤돌아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너와의 이렇게 긴 이별이 될지 몰랐다고 지금도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른단다.

사랑하는 아들 혁이야!
살아서 다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아무러한 담보도 없는 수용소에 너를 보내고 우리는 추격해오는 경비대원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사품 치는 두만강 물속에 몸을 던졌는데 다행히 중국 땅에 들어 왔고 또 다시 3국의 국경을 몇 개 넘어 이곳 자유대한에 올수 있었다.

며칠 전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에서 중국으로 친척집에 왔던 인편을 통해 네 아들, 나의 첫 손자의 사진을 받아보았다. 4살밖에 안되던 그 얘가 이제는 중학생이 되였더구나, 먼 곳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듯한 그 모습, 그 눈 속에는 자기를 두고 온 이 할머니와 삼촌들을 그리워하는 것 같고 생사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 같아 우리 온 가족은 온밤을 울음으로 보냈단다.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긴 목과 여읜 체구가 얼마나 가슴 아프게 안겨오는지 그것을 말로다 표현할 수 없단다.

오늘 너에게 네가 어린시절 한 토막을 추억으로 간직하라고 적는다.
내가 너를 업고 옥류교를 건너서 출근하던 어느 날 너는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단다. 흐르는 대동강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너는 다리 한쪽을 가리키며 “엄마, 제게 뭐여요?”, “응 그건 대동강이란다.”, “그럼 저쪽은 뭐여요?” , “응! 그것도 대동강이란다.” , “어머니 그러면 대동강이 두개여요?” 라는 너의 질문에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어린 아이가 영특하다고 칭찬에 칭찬을 하였고 그 모습에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너는 자랄 때부터 사물관찰은 물론 어떤 부정과9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오직 정의만을 위해 살던 아이였다. 그런 네가 이름도 없이 번호로만 불리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곳 수용소에서 온갖 핍박과 멸시, 굴욕을 강요당한다고 생각하니 우리 모두의 심장은 칼로 두려내는 것 같이 아프고 쓰리단다.

나 또한 음식 한 가지를 하다가도 “우리 혁이가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말을 하고 동생들도 역시 “형님이 좋아하던 것인데,,,”라고 하면서 목이 메여 먹지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어린이집에서 뛰놀던 내 손자 명성이를 그려보았는데 정작 명성이 사진을 받아보니 그처럼 힘든 세상이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도 그만큼 자란 것이 너무나도 고맙구나. 모습은 왜소했지만 사진 속 내 손자 명성이 또래 애들을 보면 그들과 명성이를 대비해보면서 명성이도 저들과 함께 놀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또 사진속의 명성이가 지금이라도 “할머니!”라고 부르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각을 가지기도 한단다.

언제면 너랑 명성이가 우리 모두와 함께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지 학수고대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처럼 추석 때 아버지 산소에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를 데리고 갈수 있을까 하는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혁이야!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꼭 건강을 보존하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살아라. 원래 강한 너이기에 우리 모두는 굳게 믿는다. 온 가족이 너와 명성이를 위해 저축통장을 만들어 놓고 다시 만나는 그날에 빼앗긴 네 청춘을 돌려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노력하고 있단다. 그때가 되면 이 어미는 만 시름을 잊고 이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너를 다시 만나지 않고서는 나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날이 언제 올지 학수고대하고 있다. 통일을 위해 우리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너는 그 속에서 꼭 강인한 신심을 가지고 살아가 천 번, 만 번 당부한다.
우리 모두도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그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련다.
사랑하는 아들의 안녕을 바라면서...
2005년 9월 4일
서울에서 어머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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