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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오빠에게2008/10/24
관리자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오빠에게


마현정




오빠, 사랑하는 오빠!


몇 년 만에 오빠라고 불러 보니 어느새 목이 메어 오네요. 그 험한 땅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그리운 형님과 사랑하는 조카들, 모두가 무사한지요... 시도 때도 없이 오빠를 괴롭히던 위궤양은 더하지는 않으신지... 오빠와 헤어진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 오는군요.



남들이 모두 대문을 걸고 자는 시절에도 혹시나 어느 동생이 밤길로 들어설 것 같아서 항상 대문을 잠그지 않으시던 정든 연면수(두만강의 지류)기슭의 오빠네 집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도 소식 없는 이 동생을 기다려 밤잠을 설치실 사랑하는 오빠와 언니들 생각으로 먼 곳에 이 동생도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고난의 행군"에 도시, 농촌이 따로 있으랴만 그래도 시내에서 배급에 매달려 사는 누이동생들이 안쓰러워 언제나 마음 놓으실 날이 없으셨던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때에 외국소설들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하나도 없이 살고 있지만 그 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은 영원히 지울 수 없어요.



낮에는 직장에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50여 리 밤길을 걸어 식량을 구입하려 떠나군 하던 시절, 아픈 다리를 옮기며 오빠네 집에 도착할 때면 거의 한 밤중이 되군 했지요. 번거로울 법도 하련만 싫은 기색 한 번 내색하지 않으시고 군불을 지펴 강냉이밥이라도 덥혀서 먹여 보내시면서도 낟알 한 키로라도 줘 보내지 못 해 미안해하시던 오빠와 형님의 그 인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먹었던 시래기나 비지가 섞인 강냉이밥과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감자장 냄새, 살얼음이 살짝 떠 있던 시원한 동치미의 찡한 맛은 이 세상 그 어떤 진수성찬에도 비길 수 없을 것입니다. 오빠네 집에 들려 돌아오는 날에는 무거운 낟알배낭을 지고 걷는 50여리 밤길도 허기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어려운 세상이었지만 그 후 더운 가족애가 있었기에 험한 세월을 그나마 견디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나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우리가 들를 때마다 오빠네 가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눈치 챈 다음부터는 먼발치에서 비치는 오빠네 집의 유혹의 불빛도 더는 저의 발길을 세우지 못 했지요. 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연거푸 신호를 보내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칠 때면 왜 그렇게 설음이 치미는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그나마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후 오빠의 존재는 남편의 바람막이도 없던 나에게는 그대로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친정집 그 자체였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의지하고 싶은 친정이었지만 야속한 세월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하지만 발길을 돌리군 하였습니다. 그나마 토대도 안 좋은 집안에 시집와서 세 조카들을 낳아 키우며 성심껏 오빠를 섬기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 형님을 생각하면 저희들이라도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동생으로의 자각이 저의 발길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피치 못 할 사정으로 그 땅을 떠나야 할 때에도 하직 인사라도 드리고 오는 것이 도리인 줄은 알면서도 행여 오빠께 루를 끼칠 것 같아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난 것입니다.


많이 원망하실 줄 압니다. 행방불명된 동생네 식구들 때문에 보위부 걸음도 하시고 또 사람들의 뒷소리도 감당하기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언제 한 번 사랑한다고 고맙다는 표현 한 마디 못 하고 살아 온 이 동생이 오늘에야 오빠께 사랑한다고, 오빠의 동생으로 살아 갈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힘든 대로 잘 버티어 나가고 있던 이 동생이 왜 기별 한 마디 없이 하루아침에 그 땅을 떠나 버렸는지 가슴 아픈 그 이유를 알려 드리고 싶어 이 편지를 씁니다.



오빠도 아시는 일이지만 96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고장을 뒤흔들어 놓은 "고난의 행군"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요. 잠을 자고 나면 어느 집에서 아무개가 죽었다는 둥, 누구네 집이 밤사이에 모두 도망을 갔다던가, 아니면 어디서 공개처형을 했다는 등 흉흉한 소문만 무성하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래도 농촌에서 약간의 부대기 농사라도 지으시는 오빠네랑은 좀 나은 편이라고 말해야 되겠죠.



아침마다 통근차를 타고 직장에 출근할 때면 밤새 통근차 안에서 얼어버린 시체를 미처 치우지도 못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둔 모습도 드문히 보게 되는데 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울적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배고팠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거적을 씌워놓은 어린아이들의 주검을 볼 때면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군 하였지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기면서도 가까이 가서 기어코 얼굴을 확인하는 나를 사람들은 의해할 수 없다는 듯 지켜 보군하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막내 동생이 남편을 잃고 세 아이들을 데리고 힘겹게 목숨을 이어 가던 중 뜻 하지 않은 차 사고로 세상을 뜬 게 아마도 96년도 였을거예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불쌍한 조카들을 차마 고아원에 보낼 수 없어서 제가 돌보고 있은 사실을 오빠도 아시지요? 그런데 사정이 점점 어려워 져서 더는 그럴 처지가 못 되어 할 수 없이 고아원에 보내놓고 언제 한 번 그 애들 생각을 잊은 적 없던 저였습니다.



길가에 방치된 어린 시체를 볼 때마다 혹시나 조카들이 아닌가 하여 확인하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 쉬군  하던 저의 처절한 심정을 오빠는 이해하실 거예요.


나날이 어려워만 지는 살림형편에 그나마 돈이 될 만한 값나가는 물건도 다 없어지고 하루하루의 생계가 위협을 받던 1998년 6월이었어요. 집안의 맏이로서 언제나 저와 함께 가정을 버티어 나가던 맏딸이 어느 날 갑자기 일주일간의 휴직기간을 이용하여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온다고 아는 사람의 안내로 두만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오빠도 아시는 일이지만 광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집단적으로 광산에 배치된 후 로임도, 배급도 못 주는 직장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맏딸이었습니다. 직장에만 매달려 아무런 희망도, 비젼도 없는 생활을 감수해 나가기에는 정말 청춘이 너무 아까운 나이였어요. 직장에서 내 주는 강냉이국수 한 그릇도 동생들을 생각하여 챙겨 가지고 내려 오군 하던 착하고 착한 그 딸이 오죽했으면 그런 결심을 했겠어요?



그러나 그 일주일사이에 무슨 돈 벌이를 할 수 있다는 안내자의 말은 새빨간 거짓이었고 그것은 딸을 중국으로 유인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주일간 중국에서의 생활을 경험한 딸은 다시 지옥 같은 그 땅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했고 우리는 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한 끼 따뜻한 밥 한 공기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그 땅, 언제 한 번 사람대접 제대로 받아 본 적도 없었던 그 땅을  떠나면서도 왜 그렇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지. 차마 어린 자식들 앞에 눈물을 보이기 싫어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태우면서 나는 돌아앉아서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 올 수 있으려는지 알 수 없었고 또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 이였습니다.



두고 떠나는 모든 것이 그 때만큼은 왜 그다지도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였는지... 나서부터  주체사상으로만 교육되고 굶더라도 그 체제대로만  생활해야 하는 것을 법으로 알고 살던 우리에게 탈북이라는 엄청난 사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땅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과 만일의 경우에 대한 불안이 그 아무리 발목을 잡아도 사랑하는 자식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더는 뒤 돌아 볼 경황이 없었어요.



막상 떠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그 때 내 심정은 솔직히 그 어떤 불가사의한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그 걸음을 멈추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튿날 우리 세 모녀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채 큰 딸을 찾기 위한 목숨을 건 중국행을 단행했지요. 두만강기슭의 버드나무 숲에 숨어 기회를 엿보면서  가슴을 조이던 그 숨 막히는 순간순간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둠속에서 사품 치는 두만강 물결은 목숨을 위협하며 보이지 않는 괴물처럼 철석철석 기슭을 치며 먹이를 찾는 야수의 울부짖음 그 자체였습니다.



차가운 두만강 물에 첫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고 물살이 세차지자 서로서로 손을 꼭 잡고 죽을힘을 다해 대안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중국 땅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목숨 걸고  찾아 떠난 맏딸은 이미 그 곳에 없었고 우리는 오도가도 못 하고 인신 매매자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광활한 중국대륙에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린 우리 네 모자가 그래도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생사를 알게 된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지요.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 집 개만도 못 하다" 는 말이 걸음걸음마다 피부로 느껴지는 4 년여의 중국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숨 막히는 도피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오늘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오빠,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너무 길어진 것 같아요,


다음 기회에는 중국에서 겪은 가지가지 이야기들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식을 전해 드리기로 하면서 오늘은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인정 많은 우리 형님과 조카들 모두가 어떻게 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줄 것을 저는 매일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형제 웃으며 다시 만나 온갖 회포를 나눌 수 있는 통일의 그 날이 반드시 멀지 않아 찾아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날을 위해 반드시 건강을 챙기시고 어려워도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기뻐도 슬퍼도 언제나 오빠를 못 잊는 동생 현정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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