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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지 않는 편지
태문선
2003년 5월 20일, 38년간 아들딸 낳고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딸자식들을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는 어머니 가슴은 찢어질듯 아팠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평성 큰딸 집에 갔다 올 때까지 집을 보아 달라고 하였다. 사실은 모르면 약이 되고 알면 독이 되어 혈육들이 가슴아플 것 같아서 금방 온다고 하였다. 올 때 역전에서 아버지 아는 안전원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역시 큰딸 집에 간다고 하였다.
평성에 내려서 부모 없는 불쌍한 손자를 데리고 청진 행을 탔다. 큰딸과 손녀도 집에서 인사하고 큰사위와 함께 역전에 나왔다. 나 혼자만이 속으로 꼭 탈북에 성공하리라고 다짐했다. 만약 가는 도중에 잘못되는 한이 있어도 불쌍한 손자만이라도 중국에 찾아가라고 팬티에 호주머니를 만들어 주소와 돈 500달러를 넣었다. 청진 행을 타고 회령을 거쳐 가슴까지 차는 두만강 물을 건너 드디어 중국 땅에 도착했다. 두만강 푸른 물소리는 어찌도 큰지 중국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사방이 조용하였으나 마중 나온 시조카와 내 조카가 내 옆에 다가와서 나를 업고 산을 넘어야했다. 12살 되는 손자는 제법 잘 걷는데 영감이 얼굴이 까맣게 되어 더 못가겠다고 하니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나도 함께 개 짖는 집 가까이 갔다. 가다 죽기보다 큰길로 모험하는 것도 괜찮았다. 두 차를 나누어 엇갈아 타면서 한사람이라도 빠져나가는 것이다. 죽어가는 영감과 손자와 나는 두 다른 차에 나누어 타고 손살같이 달렸다. 할 수 없이 운명에 맡기고 개가 짖는 큰길에 나와서 마중 나온 두 차를 갈아타면서 옷도 다 벗고 중국옷을 갈아입고 구사일생으로 셋 다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무사히 중국 동생 집까지 도착했다. 중국에 있는 동생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한 개 성을 지날 때마다 정말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호텔도 매일 바꾸었다. 삼양대련을 걸쳐 배를 타고 6월 10일 드디어 한국 땅에 당도했다.
이제야 비로소 너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쯤 어떻게 생각할까? 잡힐 위험은 면한 셈이니깐 안도의 숨을 쉰 다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딸 손녀들 모습이었다. 한국에 온지 1년도 못되어 넘어진 것이 뼈가 부서져 팔 2cm 자르고 모터기를 받았다. 6시간 수술 끝에 한쪽 팔은 90° 밖에 못 올리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때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진을 받은 결과 심장협심증, 저혈압, 골다공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지금도 모터기를 빼지 않고 살아간다. 만약 한국에 안 왔으면 죽었을 것이다.
2007년 4월 6일 천명절에 나는 아버지 산소를 방문했다. 살아서도 못 만나본 아버지 산소를 43년 만에 동생들과 함께 갔다 왔단다. 4월 18일 한국에 돌아오려고 여권수속 한 다음 이모네 집에 있는데 북한에서 전화가 와서 이모가 받았다. 얼굴을 봐도 못 알아보는데 게다가 목소리는 더 모를 것이 아니냐. 때마침 곁에 있던 내가 들으니 네 목소리가 맞더구나. 그저 <이모, 나를 살려달라>는 전화였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 물으니 어머니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서인지 살려달라는 말뿐, <이모 내일 꼭 북한에 나와 달라>는 부탁뿐이었다. 그러자 남자 목소리가 그것도 명령식으로 <내일 꼭 나오지요, 예> 전화는 끊어졌고 4년 만에 처음으로 딸의 살려달라는 애절한 목소리를 듣다니, 부모님의 행처를 그것도 북한 땅에 와서 확인 해달라는 애절한 부탁. 정말로 그 어떤 대책도 서지 않고 밤새 잠 못 이루었다.
다음날 아침 또 전화가 왔는데 남자 목소리였다. <왜 안 나오는 가!>하고 호령하니 내 동생도 화가 나서 <수속해야지!> 하고 전화를 끊고서 <언니 빨리 한국에 가라> 하기에 너의 목소리만 귀에 쟁쟁하고 살려달라는 딸을 구원할 길 없이 비행기에 몸은 실었으나 가지가지 불결한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보위부에서 너를 데리고 해주에서 국경 남양까지 확인하려 왔다지? 아직 우리 행처를 몰라 똑똑히 확인하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 목소리를 들었으니 아직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어쩌겠나. 네 운명이라고 본다. 아버지 어머니 있다 한들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니. 차라리 부모 없는 손자를 우리 늙은이가 데리고 오는 일만이 너를 위하는 길이었다. 네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 너의 곁에 있다한들 부담이 되지 도움은 안 될 것은 뻔 한 사실이지 않니. 게다가 너의 아버지를 도당에서 불러 해임시킬 때 아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병원에서 너를 데리고 나왔다. 너에게는 대단히 미안하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벌써 하늘나라로 갔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한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 있고 한국에 와서 3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물론 한국에서 좋은 의료설비로 치료를 받고 본인이 한약처방으로 건강을 다시 회복하여 중국 여행까지 갔다 오는 것은 기적이다.
늘 너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문경군의 자연을 자랑했다. 선조가 묻힌 산소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고향에 찾아가 보았으나 산소는 없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있다. 부모님들의 명암과 아들이름 석자를 호적에 올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부모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담겨있고 하늘나라로 간 조상들이 반겨 맞는 것 같아 3번이나 갔다 왔단다. 고향마을에 가서 자기 나이 70이 넘는데 어떻게 옛사람을 물어서 알겠니. 사정없이 흘러간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더라.
아버지는 너와 너의 온 집안 식구들이 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어머니도 원망하지 말라. 네 어머니 역시 5대로 내려오면서 이산가족의 슬픔을 안고 혈육끼리 다시는 서로 편지조차 못하는 나라에서 이별의 고통을 면하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일가족이다. 나도 73이 된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가 다시 못 본 혈육의 이별을 가슴아파하시던 그 심정을 이해할만하단다.
또한 그 슬픔이 큰 상처로 가슴속에 남아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회억하시던 그 마음, 죽어서도 한데 있고파 하시던 그 소원을 들어주려 중국의 그 어느 곳에서 돌아가셨더라도 될수록 한곳에 산소를 쓰시었다. 그것이 후대들의 몫인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나서 자랐으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 중국에서 교육받은 것은 오직 제가 나서 자란 곳, 경제적 도움을 받고 교육받은 곳이 바로 조국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어려서 우리글과 천자는 집에서 배웠으나 중국민족은 중국 34개성 앞에 토끼처럼 생긴 땅이 조선이라 불렀어도 그것이 진정한 나의 조국이라 생각한다. 그곳에 몹시 가구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 고향에 꼭 가고 싶었다. 드디어 1965년 2월 남편과 함께 중국 땅을 떠나 북한에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의 나이는 28살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와의 생이별이 되었고 불쌍한 아버지와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것이 인생인가보다.
우리 아버지는 8살에 고향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홀로계신 고조할머니와 동생(작은할아버지)이 북한에서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형이 혼자서 12, 10, 8, 6, 4살 되는 다섯 아이를 키우는 중 입 하나라도 덜어주려고 8살 되는 아버지를 데리고 조선에 왔다. 살림이 어려운데 조카 하나 더 먹이자니 그 집 부부는 늘 싸웠다. 부부싸움할 때마다 조카를 시베리아에 데려다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버선과 짚신을 작은 가슴에 안고 밖에서 기다렸고 그러다 지쳐서 잠들었다. 배고픈 고생 속에, 형제와 아버지의 품을 떠난 후회를 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자기 집을 그리워하면서 한 많은 세상을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모진 세월 속에서 우리 아버지는 잔뼈가 굳어져 19살이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국가지간에 문이 열렸는지 러시아에 있는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우리 아버지를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찾으셨다. 혼자서 아들딸들 다 시집 장가들게 하여 대 식구를 거느리고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자리 잡고는 조선에 있는 동생과 우리 아버지까지 한곳에 모였다. 즉 이산가족에서 해방된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때야 비로소 서울에 와서 할머니를 얻어서 잘 살았다. 서울 할머니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할아버지에 못지않게 자그맣고 예쁜 할머니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50대였건만 네 며느리와 딸들이 아버지가 장가간다고 밥 먹을 때 우스운 옛이야기 하듯이 들려주곤 하셨단다. 그때 네 며느리는 참말로 다정했고 한집에서 다함께 살았단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생한 것이 나라 없는 탓인 줄 알았는지 독립운동한다면서 집에 늦게 또는 새벽에 들어와서 할아버지께서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한번은 일제 순사 놈이 마을 사람들 모아 놓고 할아버지, 아들, 며느리 세 식구가 사는 집에 와서 아들이 어디 갔는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할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는 불 지르고 도망쳤다. 집안에는 임신 중인 며느리가 있었다. 다들 무서워 떠는데 우리 아버지는 서슴치않고 며느리를 업어 집방에다 감추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다가 그쳤다. 아버지는 아이를 밖에 눈 속에 파묻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주려는 것이었다. 꺼내어 몇 일 있다가 이름까지 지어서 남조선 있는데 보내도록 도와주었다. 훗날 아내와 아이를 살려준 우리 아버지에게 독일제 재봉기를 보내주었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집에 들어오곤 했다. 어느날 새벽 일제 경찰이 우리집 문고리마다 걸어 잠그고 우리를 밖으로 못나가게 하다가 아침식사 하러 오는 아버지를 체포하였다. 연길 감옥에서 3년간 징역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나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키도 크고 몸도 좋았지만 3년간 살아 돌아오니 몸은 쇠약해 졌다. 다행히 외삼촌이 유능한 한의였다. 외삼촌 덕에 돈들이지 않고 약을 써서 병도 다 치료되었다.
아버지는 해방과 더불어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사시면서 다시는 이산가족이 되지 말기를 부탁했다. 그 소원을 어기고 북한에 너희를 두고 왔으니 정말로 후회가 막심하다.
너야말로 북한에서 보위원과 안전원들이 노리는 고기감이다. 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먹고 안전원은 안전하게 먹는 그런 법 없는 마구잡이 제도에서 모가 행방불명이라는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니? 나는 끝없이 너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러나 네가 눈뜨고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을 날기를 바란다. 세상은 넓고도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러나 북한은 눈먼 바보로 만드는 감옥이니 어서 눈뜨고 사선을 헤치고 나올 때만이 인간으로서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글로써 쓸 뿐 어떻게 전할 길 없구나.
어머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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