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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고 싶고 그리운 언니에게
곽수진
벌써 세월이 흘러 2007년도 중반이 다 되었네요. 작년에도 이맘때쯤 편지를 써서 언니에게 보냈는데 당연히 못 받아 보셨겠죠. 언제면 우리 가족이 마음대로 소식을 전하며 오가는 날이 올까요. 한국에 온지도 벌써 7년, 해가 바뀌면 나무에 연륜이 새겨지듯 나의 인생에도 그 사이 많은 변화들로 뚜렷하게 연륜을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니, 참 많이 울었죠, 곁에서 볼 수는 없지만 모든 일들이 눈에 보일 듯 선해요. 특히 정민이 누나 영심이가 사고로 잘못됐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요. 아버지께선 정말 눈물을 많이 흘리셨죠. 우리가 고향에서 함께 살 때 부모님은 첫 외손녀인 영심이가 정말로 똑똑하고 대견한 아이라고 늘 칭찬하셨잖아요. 우리가 그곳에서 함께 살았더라면 그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우리가 떠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밤을 꼬박 새우시고 식사도 전혀 하시지 않으시고 언니 가족들 걱정만 하셨어요.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들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랑하는 언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는 이 마음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캄캄한 서울의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무리 울어도 가시지 않는 그리움, 어찌하면 좋을까요. 고향에서는 어리광도 부리고 예쁜 옷, 만난 것 있으면 먼저 차지하고 얄밉게 굴던 내가 여기서는 맏이라는 자리에서 언니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미여집니다.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엄마 아빠께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부모님 대신해서 동생들을 잘 이끌어주던 언니를 저는 존경합니다.
언니, 아버지는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시고 어머니는 재작년 가을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골수에서 혈소판 생산을 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네요. 평생 중한 병을 모르고 살아오신 분이라 온 가족이 많이 놀랐어요. 처음엔 동네 근처에 있는 00대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하시다가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00대학병원”으로 옮겨 지금도 계속 치료를 받고 있어요. 00대병원에서 진찰 후 골수이식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다고 했었지만 천만 다행히도 증상이 조금 호전되고 병세가 많이 나아져 수술을 받지 않고 수혈을 받고 약물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북한에서 이런 병에 걸렸더라면 과연 어떤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까 하고요. 발전된 선진 의료진과 의료기기들로 무장한 대한민국이니까 부모님이 지금까지 이런 의료혜택 속에서 사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니, 고향에서도 총명하다고 칭찬받던 동생이 여기서도 잘하고 있어요. 서울 고려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유학공부를 하고 있어요. 고향에 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들을 여기서는 마음먹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이루어 낼 수 있어요. 저도 한국에 온 후 보건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마치고 치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요. 동생이나 저도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야 나중에 언니를 만나도 떳떳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보고 싶은 언니, 우리가 떠나온 후 형부는 일하던 기업소를 떠나 광산으로 직장을 옮기셨다죠. 언니도 다니던 그 좋은 직장을 그만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 죄스러운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언니, 용기를 잃지 말아주세요. 마치 요람속의 아이처럼 포근하고 따뜻이 감싸주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여기에 있어요. 통일이 되어 반드시 우리는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작년 4월 평생에 잊지 못할 결혼식을 올렸어요. 행복한 날에 언니가 없어 많이 슬펐지만 고향에서 함께 기뻐해 줄 거라 믿었기에 즐겁게 결혼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참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에 온 이후로 교회에 나가세요. 물론 언니는 교회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겠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교회에 나갈 결심을 하였다. 누가 나가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간다. 꼭 하나님이 있어서라기보다 마음속에 기둥을 세우고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고향에서는 하나의 사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키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달라요. 교회를 나가 하나님을 믿더라도 자기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또 다른 종교를 가질 수도 있어요. 한국과 북한은 정말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니, 우리가 북한을 떠나 중국에 왔을 때는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몰라요.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살던 우리가 밤에도 환하게 거리를 밝혀주는 찬란한 불빛에 매혹되었고 호수에 비치는 불빛이 미풍에도 물결 따라 춤추는 광경이 참 아름다웠어요. 이것만으로도 사람 살맛나는 땅이 아닌가 하고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었죠. 그 어디를 가나 먹거리가 넘쳐나고 생황의 풍요로움이 있는 중국은 말 그대로 낙원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에 왔을 때는 중국과는 또 다른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밤마다 한숨쉬며 잠 못 드는 고향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어요. 언어가 같고 한민족이 사는 한국 땅은 말 그대로 자유가 있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발전한 나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니 불모의 땅으로 변한 내 고향, 내가 자라고 정이 든 메마르고 거친 땅을 못 잊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왜서 일까요. 하룻밤에도 몇 번씩 고향을 오고 가며 꿈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언제면 우리가 만나 행복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할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손꼽아 그날만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만나고픈 마음이 이렇게 간절한데 하나님도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 믿어요.
아버지, 엄마, 동생 우리 모두는 걱정하지 마세요. 만날 날 만을 기다리며 건강하게 잘 살고 있을게요. 더불어 언니, 형부, 조카들 모두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내년에 또 서면으로나마 만나길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줄일까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2007년 6월 30일
서울에서 동생 수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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