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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삼가 올립니다.
마미희
아버지!
전 이 편지를 보내지 못할 줄을 압니다. 보낼 방법도 보낼 곳도 없는 편지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밤은, 비 오는 이 밤만은 웬일인지 너무 사무치게 그리워 보낼 곳도 없는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씁니다.
벌써 40여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옛날 음풍명월이나 하던 사람들은 세월이 유수 같다고 했다지만 오늘은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1964년 9월 20일이었지요? 아버지가 잡혀가셨던 날 말입니다. 그때에도 우리 살림살이는 너무나도 어려웠지요. 그 위대하다는 아무개는 여러 해 전에 벌써 멀지 않아 우리 인민 모두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을 쓰고 살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살기는 다 쓰러져 가는 단칸집에 늘 강냉이 죽 아니면 풀 섞인 옥수수밥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한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협동농장 밭에 나가 별을 지고 돌아오고 철없던 저는 언니 오빠들을 따라 학교에 갔지요. 걱정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늘 몸이 편치 않아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약을 간식처럼 드시고 밤새 앓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이제 멀지 않아 이밥에 고기 국을 먹는 세상도 온다니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느냐, 너희들은 그저 공부나 잘해서 당의 은덕에 꼭 보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른바 행복한 날들 중에 우리 집에 무서운 불행이 닥쳐오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요. 그날은 추석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농장 일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아침도 거르신 채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저보고 윗마을에 사시는 큰 아버지네 집에 심부름을 갔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큰어머니가 아침도 제대로 못 드신 아버지 드리라고 계란 몇 알과 술 한 병을 가져가라고 해서였지요. 이웃 마을에 사는 큰 어머니가 챙겨 주신 꾸러미를 들고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였습니다. 제 친구 명순이가 달려 나오다 말했습니다.
“안전부에서 와서 너희 아버지를 잡아 갔어, 너희 아버지 반동이래”
“그게 무슨 소리니, 우리 아버지 반동이라니?”
“몰라, 하여간 안전부에서 와서 잡아 갔어”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해방 전에 왜놈 산림대에 끌려가 몇 달 있었던 적이 있었다지요. 그것도 자원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끌려가서 말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산림대라는 것이 일제의 앞잡이로 “공비” 토벌에나 쫓아다니는 무리라는 것을 안 다음에는 곧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수사가 풀릴 때까지 계속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떻게 주재원의 귀에 들어갔는지 그는 아예 아버지를 해방될 때까지 일제 순사를 한 것으로 꾸미었다더군요. 그리고 허위 문서를 날조하여 그때까지 계속 반동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지요.
그날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잡혀가서 없고 어머니는 그대로 방바닥에 정신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온 집안은 꼭 도둑질 맞은 집 같이 되었는데 전 꾸러미를 든 채 우두커니 문가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안전부 놈들이 나와 가택수색을 했다는데 그 때에나 그 후에나 아무 것도 없었던 우리 집에서 뭐가 나왔겠습니까. 방안에 걸려있던 사진 액자에서 가족의 추억이 담긴 낡은 사진 몇 장과 오빠의 헌 가죽 띠를 거두어 간 것이 전부였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헌 가죽 띠가 또 일본 토벌대의 혁대로 둔갑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참으로 그날 밤 우리 집은 너무나도 처참했습니다. 뒤늦게 오빠, 언니들도 왔지만 그들이 왔다 해도 달라질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저희들은 아버지가 금방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워낙 착하신 분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묵묵히 농장 일에 열성을 내시었던 아버지이십니까. 그리고 자신께서는 고생하셔도 우리가 살게 될 때에는 분명 이밥에 고기 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게 될 거라고 하셨던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인 것을 알기에 어디 나가 놀다가도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돌아왔지? 아버지 돌아왔지?”
하지만 그때마다 맞아준 건 불도 때지 못한 방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어머니의 앓는 소리와 대답 없는 공허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길도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간혹 남들 몰래 혀를 차며 떡 한 조각 집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눈은 전에 없이 냉냉해 졌습니다. 같이 놀던 애들마저 반동의 자식과는 놀지 않는다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선생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어버이는 김일성원수님이고 우리의 집은 당의 품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어버이는 김일성원수님이신데 또 우리가 사는 집은 당의 품인데 왜 이런 일이 풀리지 않겠는가고 말입니다.
그렇게 날과 날이 흘러 며칠이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공부 밖에 없었습니다. 공부, 공부, 공부 밖에 몰라 해마다 전교에서 일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또 한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받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버지가 잡혀 가신 뒤에는 아무리 공부를 잘하여도 반동의 딸한테 일등을 줘서는 안 된다고 저는 아예 등수에서 밀어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고등농업학교의 문전에서까지 밀려 났을 때의 그 마음을 아버지도 아마 다는 모르실 겁니다. 그런 속에서 귀도 막고 눈도 막고 입도 막은 채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실컷 울어 본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차마 그 땅에서는 더는 살 수 없어 두만강을 건너 먼 남의 나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무덤이라고 해야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혹은 살아계실지도 모를 아버지의 무덤입니다.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아버지가 잡혀가신 날을 기일로 아버지의 헌 옷가지들만 묻은 무덤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이 땅에서 저희들을 태어나게 하였습니까. 세상에 나라가 그렇게도 없었습니까. 저는 오늘 이 땅을 떠나가야 합니다. 그래도 나서 자란 정든 고향인데 말입니다. 원통합니다, 가슴이 터집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불효한 이 딸은 떠나갑니다. 아버지!...”
그리고 또 수 없이 많은 피의 강, 눈물의 강을 헤쳐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왔습니다. 오늘은 어느 한 아파트 불빛 밝은 창문가에서 이 글을 씁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시던, 이밥에 고기 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고 싶던 꿈 같은 소망을 다 이룬 채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딸이 어느덧 아버지 잡혀가시던 때 나이를 훨씬 지났어도 싸우겠습니다. 아직도 그 땅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조국통일의 봄을 안고 꼭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 그럼 통일의 그날 고향의 뒷산에 온갖 꽃이 만발할 때 다시 찾아 뵐 것을 약속드리며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2007년 6월 20일
딸 미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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