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고, 그리운 친구들에게 이 글을 전한다.
한현순
보고 싶은 북한에 있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아~!
그동안 잘 지내고 있니? 단짝 친구 련화, 금희, 명심이, 청심이... 사랑하는 너희들의 이름을 불러 보노라면 어려운 고난을 함께 극복하고 보람찬 사회생활을 약속하던 그 날 밤이 생각나는구나. 잊을 수 없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날 선생님께서는 녹음기에 내가 부르는 노래를 처음으로 녹음해 주셨지.
<다시 한번 더 보자 백양나무야,
글소리 낭랑하던 내 정든 교실아~!
우릴 위해 아낌없던 스승의 은혜,
어딜 가도 언제나 잊지 않으리.>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가족을 따라 다시 돌아 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두만강을 눈물로 건넌지도 어느덧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미안해 친구들아, 너희들과 한 그 약속 지키지 못해서...... 너희들과 같이 사회생활도 해 보고 싶었고 처녀 시절도 멋지게 장식 하고 싶었는데, 모두가 제일 힘들고 굶주리던 시절에 나만 혼자 이렇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는 천국 같은 나라로 찾아 온 것 같아서 언제나 너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란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지금 너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무리 그려 보아도 열일곱 단발머리 소녀들의 발랄하던 모습밖엔 상상이 안 되는구나. 특히 나의 단짝이자 첫 번째 라이벌이었던 연화가 제일 보고 싶다.
연화야~! 전학 가서 처음 만났을 때 너와 나, 참 많이도 싸웠었지? 싸움 끝에 정 든다고 나중엔 제일 친한 단짝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야. 그때 너는 조금이라도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애들은 학급 애들을 휘동해서 ‘왕따’를 시켰고 모든 활동에 제외시키면서 한 마디로 학급에서 제일가는 ‘따왕’ 노릇을 했었지. 적어도 내가 너희반에 전입하기 전까지는...
그런 너의 행동이 너무 얄밉고 눈에 거슬려 나는 언제나 네가 괴롭히던 상대 앞에 방패처럼 막아 나섰고 심할 땐 너의 뺨까지 때렸지. 그래서 넌 코피를 흘린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결국 어느 날인가 병원에서 치료 받는 상황까지 되었고 덕분에 나는 선생님께 톡톡히 경을 치렀지. 네가 잘못한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약한 아이 편을 들어준다고는 해도 왜 말로 널 타이르고 이해시키지 못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한심했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그때 받았던 죄책감으로 인해 나는 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누가 나에게 아무리 못 되게 놀리거나 욕을 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적어도 손찌검 같은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싸움 끝에 정 든다고 그 후 우리는 다른 애들이 부러워하는 단짝 친구가 되었고 우리 둘이 마음먹고 시작하면 어떤 일도 막힐 것이 없었지.
친구야~! 생각나니? 네가 휘어잡고 있던 그 학급에 내가 처음 전학 온 그날 말이야. 단발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규찰대의 단속을 받아야 하던 그 시절, 소년회관 공연팀이라 특별히 허락된 치렁치렁한 머리채에 또래들보다 한 뼘은 더 큰 키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나의 모습들을 너는 부러움과 시샘이 역력한 얼굴로 바라보았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면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건네지 못 했지만 네가 제일 먼저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었지.
너와 나 사이가 좋아진 후 학급 애들은 심지어 남학생들까지 우리들의 말을 잘 따라 주었고 농촌 동원이나 화목 동원 같은 힘든 일도 우리에게는 오히려 낭만 그 자체였어. 그리고 해마다 설날이 오면 우리 학급 교실을 예쁜 색깔의 테이프와 풍선, 그리고 아름다운 꽃송이들로 학교 중에 제일 멋지게 장식하고 그 자리에서 밤 새워 준비한 공연도 했었지? 그때 내가 지도했던 기타 병창 실력은 선생님들과 전교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그 후부터는 남학생들까지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성가시게 굴었지. 기타 칠 줄 모르면 군대에 가서도 축에 빠지게 될 정도로 그 때 북한에서는 기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다운 학교와 다정했던 친구들, 무심히 지나쳤던 그 모든 일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될 줄 우리는 미처 몰랐구나. 중국에서 힘든 생활을 겪을 때마다 그 때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워서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곤 했다면 너희들이 믿어 줄까?
5학년 때 반장으로 내가 책임졌던 반 애들이 굶주림에 하나, 둘, 학교에 나오지 못 할 때면 철없는 마음에도 가슴이 아파 엄마 몰래 집에 말리려고 걸어놓은 국수사리와 국수떡을 그 애들한테 가져다주던 일들이 생각나는구나. 우리 집도 별로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기에, 국수사리도 엄마는 개수를 세어놓고 일 나가셨다가 저녁에 돌아 오셔서 몇 개가 모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나에게 따져 물어 보셨었지. 거짓말을 못하는 나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여러 번 계속되자 엄마도 더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지. 그때 우리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현순아, 네 마음은 엄마가 이해한다. 더 도와주지 못 하는 게 안타깝지만 옛 속담에 ‘가난 구제는 임금님도 못 한다’ 고 했다. 네가 그렇게 가져다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또 점점 직장사정이 어려워져서 엄마도 힘에 부치는구나.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내가 미안하구나.>
언제나 친구들을 사랑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고 또 그렇게 모범을 보여 주셨던 엄마가 오죽하면 그러시랴 싶어서 정말 엄마한테 미안했었어. 식량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1년 후에 그 애가 굶어서 죽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어.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게 사실이구나, 굶으면 사람이 죽을 수 있구나!>
그런 가난 이었고, 그런 고달픔 이었고, 그런 굶주림을 겪어보았기에, 그래서 나는 지금 너희들한테 ‘잘 지내니?’ 라는 쉬운 말도 차마 할 수가 없구나.
친구들아~! 보고 싶고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아~!
굶주림과 무 권리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너희들을 두고 혼자만 이 천국 같은 대한민국에서 근심 걱정 없는 생활을 누리면서 꿈에도 그리던 대학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힘들게 살고 있을 너희들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란다. 먼 나중에 통일이 되어 너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날이 되면 용서의 눈길로, 이해의 손길로 너희들한테 내미는 이 손 잡아줄 수 있겠니? 내가 제일 걱정스럽고, 답답하고, 속상한 것은 너희들을 만날 때 나를 외면 할까봐, 나의 우정을 이해하지 못 할까봐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구나.
친구들아~ 너희들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나는 한 번도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도 여기서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위해, 통일의 그 날 너희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열심히 살아 갈 것을 약속할게. 너희들도 그 때까지만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서 열심히 살아 줄 것을 바란다. 헤어져 지내야 했던 그리웠던 모습들, 얼싸안고 춤추고, 노래하며 그 동안의 수많은 사연들을 날이 새도록 주고받을 통일의 그 날이 반드시 찾아 오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싶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부디 그 날까지 안녕히!
너희들의 사랑하는 친구 현순이가 그리움을 담아 이 편지를 쓴다
2007년 6월 17일
서울에서 현순이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