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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조카에게 보내오2007/10/12
관리자

그리운 조카에게 보내오

 김호연


  우리가 서로 헤어진지도 1년이 모자라는 10년이 되었구만.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소? 정치적 차별대우와 감시, 굶주림 속에서 조카를 비롯한 온 가족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삼촌이지만 별 다른 대책 없이 세월의 흐름과 같이 나이만 먹어 이제는 나도 70을 바라보고 있소.


  우리가족이 그곳을 떠나온 직후 그곳을 떠나 이곳에 온 인편을 통해 들으니 나와 동갑이었던 큰 조카와 둘째 조카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조카와 막내 태경이만 남았다 하더군. 이 소식을 듣고 나와 나의 아들들은 조카와 사촌형들을 그리며 너무나 가슴이 아파 온 밤 잠도 못 이루고 한없이 울었다오.


  해방 전에 사진사를 했다는 것이 죄가 되어 너의 아버지는 친일주구로 몰리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부모형제와 어린 자식들을 정든 고향에 남겨두고 38선을 넘었지. 그렇게 한국에 온 네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정치적 핍박과 차별대우를 받았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차려지는 것이 오직 하나 ‘월남자 가족’은 응당 말없이 당에 충성하는 것. 그래야만 이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것뿐이 아니었소.


  큰 조카가 영영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소. 과묵한 성격, 자기 맡은 임무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던 말없는 그를 생각하면 우리운명이 너무나 가혹함을 뼈아프게 느끼오.

00광산에서 작업반장을 하던 큰 조카의 영웅담은 온 당산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눈감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소원을 성취 못했소. 광석을 실어 나르던 삭도가 쇠밧 줄이 중간에 걸리며 언제 끊어질지 모르던 위기일발의 순간, 온 광산이 수백 미터 위에서 대롱대롱 흔들거리는 수십 개의 삭도를 바라보면서 숨죽이고 있던 그 순간, 큰 조카는 온 광산 종업원들과 지휘관들 앞에서 “제가 저 쇠밧줄을 연결시키겠습니다. 전부 임무라고 생각하고 생산을 정상화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만약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라고 다음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저를 노동당원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의 자식들을 당원의 아들, 딸 이라고…….” 그러고서는 큰 트럼통의 위 뚜껑을 떼고 거기에 올라타 삭도줄을 한 뼘 한 뼘 잡아당기면서 사고 지점까지 향해 갔지. 고산지에 겨울이라 그날따라 바람은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 큰조카가 탄 드럼통은 마치 공중곡예를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바람 따라 마구 흔들어댔지.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들은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심장의 박동소리도 멈추듯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 큰 조카는 최후를 각오한 사람이었기에 그 임무를 수행하고 온 광산은 다시 살아나 생산을 정상화했지만 소원은 끝내 이루어 지지 못했지. 온 광산이 영웅이라고 칭찬했지만 월남한 아버지 때문에 “숨은 영웅”이라는 접두사를 앞에 달고 말았지. 그런 큰 조카니, 70도 못되어 골병이 들어 사망했다니 정말 억울하다. 이것이 나나 조카들 앞에 차려진 운명이었소. 나 역시 30대 후반까지도 노동당원이 못되고 말이지.


  그런데 우리 운명이 이렇게 180°로 변할 줄 상상인들 해보았겠소. 내 6촌 동생이 흠잡을 데 없이 체계적인데다 온갖 악기는 다 유능하게 다루었는데 인민군 협주단에 발탁되어 단소로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용진가”를 부르지 않았었소. 그 곡은 해방 전 우리학교 체육대회 응원가였는데 그 단소 소리를 들은 김일성의 딸 김경희가 자기 아버지에게 보고했고 그 곡을 다 들은 김일성은 “아 그 노래는 우리가 항일유격대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그 출처를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그 즉시 많은 중앙당 일꾼들이 우리 마을에 왔소. 함남도 풍산군 00리 주민세대 100여호 등으로 보고하자 김일성이 그곳에는 100여명의 조국광복회 회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주 잘 싸웠다고 칭찬하자 급기야 온 고향마을이 혁명 전적지가 되었고 주민전체가 광복을 위해 싸운 투사와 그의 자녀들로 자리바꿈을 하여 우리 가문에도 혁명가 유가족이라는 명예를 안기게 되었지. 그러나 조카네는 월남한 아버지 때문에 그 영예도 받지 못하고 계속 그늘 속에서 살았지. 나는 그래도 촌수가 한발 멀어 급기야 대학교수로, 나중에는 00대학의 당 비서로까지 승승장구하였지.


  하지만 00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조카를 광산의 기술혁신조에 망라된 것을 최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요. 그래도 조카들은 유급당일꾼이 된 이 삼촌을 큰 기둥으로 자랑으로 여겼지. “삼촌, 우리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당 비서라는 삼촌이 있기에 어디에 가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라면서 이 삼촌의 말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100% 받아들였지. 조카들의 그 마음이 고맙기에 앞서 나를 몹시도 아프게 하였다오.


  그리고 나도 정년퇴직을 하여 더는 조카들에게 큰 버팀목이 못되었고 거기에 덧창으로 온 나라를 기아와 빈궁으로 몰아넣던 1998년은 또다시 우리 가정에 큰 불행을 가져다주었소. 환갑이 지난 이 삼촌, 당 비서까지 했던 이 삼촌도 풀죽으로 끼니를 잇고 몸이 퉁퉁 부어오르자 조카들은 우리 가문의 기둥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면서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을 찾아 떠나라고 나의 등을 떠밀어주었지. 내가 가면 우리 가문에 또다시 큰 박해가 올 것을 예견하여 내가 망설이자 조카들은 “삼촌! 그보다 더한 고통 다 참아온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는 참고 사는데 단련된 사람입니다. 우리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삼촌만이라도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면서 한 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압록강가까지 데리고 와서 안내원에게 맡기었지.


  나는 그때 내 정신이 아니었소. 무슨 정신으로 내가 안내원들에게 이끌리어 강을 건넜는지 모르겠소. 내 그때 생각에 빠른 시일 내에 중국 친척집에 가서 얼마간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소.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의 운명은 이다지도 가혹하오. 내가 중국에 도착하자 해방 후에 월남했던 형님과 조카들이 나를 찾아온다는 연락이 왔소. 하루, 이틀 기다린다는 것이 2개월이 되었고 나는 중국에서 형님과 조카를 만났다. 조카의 아버지와 동생들을 말이요. 그런데 나한테 보이지 않던 북한 보위부 감시망이 와 닿은 줄 어찌 알았겠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숨겼는데 내 아들 태석이가 중국에 와서 하는 말이 “보위부에서 아버지를 당장 잡아오라고 지시했답니다.” 원인인즉 한국 사람인 형과 조카를 만난 것이 죄가 되었다는 것이오. 잡혀가서 수많은 제자들과 동료들 앞에서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형님이 있는 한국으로 가기고 결심을 굳혔소.


  그러나 한국행 역시 험난한 노정이었소. 태석이와 함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고난을 뒤에 두고 한국을 향해 몽골 땅에 들어섰소. 사방 둘러보아도 수연한 사막뿐이고 불볕에 온몸이 타는 것 같았소. 물 한모금도 없고 우리가 가는 주위에는 사람의 뼈인지 짐승의 뼈인지 뼈 무더기만 있었소. 이내 환갑을 넘은 나는 더는 육신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았소. 할 수 없이 나는 태석이에게 “너는 젊었으니 어서 가라. 네가 살아갈 수만 있다면 훗날에라도 이 아버지가 몽골 사막에서 한국에 오려다가 이름 없이 죽었다고 말해다오” 라면서 싫다고 하는 아들의 등을 떠밀었소. 태석이는 비정한 각오를 가지고 무작정 달리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 내몽골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주고 다시 나를 데리러 왔소.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어느 몽골사람들의 천막이었소. 물을 먹이고 물도 뿌리고 해서 기적적으로 살았소. 이때 태석이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더 말을 못하였소. 이때부터 그들의 도움으로 몽골주재 한국대사관에 갔고 한국행에 성공했소.


  이제는 이곳에 온지도 6~7년이 되었소. 한국에서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없이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고 있소. 또 나는 나이가 많다고 여러 가지 추가 혜택도 받고 있소. 내 나이 70이지만 오히려 그곳을 떠날 때보다 더 젊어진 것 같소.


  그 후 이 삼촌 때문에 조카들이 받고 있을 정치적 핍박과 차별대우의 값을 치르려고 수천에 걸쳐 지원금을 보냈는데 한 번도 성공 못했구려. 금년 초에 그곳에서 이곳에 온 고향사람들을 만나 조카들의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소. 그러니 나는 여기서 근검절약하면서라도 반드시 조카들에 구원의 손길을 보낼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달려주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도 잊지 말고 잘 관리하고 형제간에 더욱더 사랑하고 아끼면서 화목하게 살아가기 바라오.


  참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으오. 만나면 상세히 기나긴 생활의 사연들을 털어놓으면서 울고 웃고 합시다. 건강히 잘 지내오.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면서 강하게 살아갑시다. 나도 죽어서라도 고향에 꼭 가고 싶은 심정이오. 죽기에 앞서 꼭 살아서 가기만을 희망하오.

안녕히.


2007년 6월 15일

서울의 00아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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